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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고대도시의 거주 인구는 무려 백만 명에 달했다.
도시는 메콩강의 범람원을 중심으로 한 크메르제국의 심장부였으며 그 이름은 도시를 뜻하는 앙코르였다.
< 크메르제국의 영토( 녹색 ) 와 중심부 앙코르 >
그리고 앙코르에는 런던 탑의 2배의 높이와 당대 유럽의 그 어떤 대성당보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힌두사원 앙코르 와트가 자리 잡고 있다.
와트는 사원 또는 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 앙코르 와트의 위치 >
앙코르 와트의 건축 면적은 2㎢이며 축구장 250개~300개를 합친 거대한 규모이다.
규모뿐만이 아니다. 앙코르 와트가 더욱 대단한 것은 바로 물위에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말해 앙코르 와트는 메콩강 범람원 늪지대 위에 떠있는 거대한 사원인 것이다.
< 물위에 떠있는 앙코르 와트 전경과 단면 >
누가? 어떤 이유로 열대우림 한가운데 거기다 지반이 불안정한 늪지대에 이런 위대한 건축물을 건설했을까?
앙코르 와트의 건설은 강력한 통치자이자 반신으로 여겨지던 위대한 전제군주의 발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바로 수르야바르만 2세이다. 14세의 수르바야르만은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지만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왕국을 돌아보던 왕을 그가 습격했다고 한다.
14세의 야망에 찬 이 소년은 왕의 일행을 급습하였고 혼란을 틈타 왕이 탄 코끼리에 올라타 왕을 베었다.
반정에 성공한 소년은 태양의 수호자란 칭호와 함께 수르야바르만 2세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 앙코르 와트의 수르야바르만 2세의 부조 >
전설에서도 알수 있듯이 수르야바르만은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불안전한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들에게 새로운 지배자로써 인정받아야만 했다.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정통성이 의심스러운 왕들은 건축과 예술을 통해 자신이 신에 의해 선택받았음을 강조했다.
그의 앙코르 와트 건설은 반정 이후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르야바르만 2세는 사원 건축에 들어가기에 앞서 승전을 비는 힌두 신 비슈누를 자신의 수호신으로 정했다.
< 앙코르 와트의 비슈누 >
자신의 수호신인 비슈누를 기리기 위해 평범한 크메르식 목조건물이 아닌 영원불멸한 재료인 돌을 써서 사원을 짓기 시작했다.
수르야바르만 2세의 명령에 의해 7백여 개의 사원이 지어졌지만 그는 더욱 위대한 사원을 원했다.
수르야바르만 2세는 신들의 세계인 천계를 그대로 지상에 옮기고 싶어 했다.
힌두교의 천국은 히말라야 북쪽 어딘가에 있다는 영산 메루산이다.
메루산에는 신들이 사는 다섯 봉우리가 있다. 수르야바르만 2세는 이런 천국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었다.
천계의 다섯 봉우리를 그대로 앙코르 와트에 옮겨놨다. 앙코르 와트 중심에는 65m 높이의 다섯 탑이 있다.
< 신전산으로 불리오는 5개의 탑 >
이 5개의 탑은 신을 모신 곳임과 동시에 수르야바르만 2세에겐 자신이 죽어서 갈 천국이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선 지상에도 천국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 탑에는 수르야바르만 2세의 시호 ' 파라마비슈누로카 '가 새겨져있으며 사원이 지어진 방향은 정서쪽으로 죽음을 뜻한다.
< 수르야바르만 2세의 시호 파라마비슈누로카 >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앙코르 와트는 수르야바르만 2세가 내세로 가는 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르야바르만 2세가 죽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앙코르 와트는 완성되어야만 했다.
그의 생애 동안이란 단서가 붙은 앙코르와트 건축은 실패란 용서되지 않았다. 그런 반면 앙코르 와트 건설에 장애는 무수히 많았다.
앙코르 와트가 건설될 부지는 덥고 습한 우림으로 터를 닦기도 쉽지 않은 곳이었다.
거기다 공사 규모는 위에 언급했다 싶이 축구장 250개 ~ 300개의 면적에 달했다.
칼과 도끼와 같은 기초 장비만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벌레에 쏘이며 무수한 나무를 베어 토지를 개간해야 했다.
크메르제국의 수도가 앙코르였기 때문에 국가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사원은 꼭 그곳에 지어야 했다.
이 말은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석장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옮겨 잦은 폭우에 시달리는 범람원 습지 위에 영원히 이어져갈 초대형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는 뜻이다. 현대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어마어마한 건축사업이다.
앙코르 와트의 공사 추정 기간은 약 35년이며 영국에서 그렇게 빨리 완공된 성당은 솔즈베리 대성당(38년만에 완공)뿐이다.
나머지는 대성당들은 완공에 2백~3백년이 걸렸지만 그 규모는 앙코르 와트보다 작았다.
< 솔즈베리 대성당과 앙코르 와트 >
우선 앙코르 와트의 기초 토대 공사를 위해 땅을 파낸 뒤 모래 → 돌 → 모래 순으로 깔아 표면을 고르게 만들었다.
신관들은 신께 제사를 드리며 공사의 길일을 택한 뒤 토대 위에 염료를 묻힌 끈으로 천당의 의미하는 만다라 문양을 만들었다.
< 만다라 문양과 앙코르 와트 중심의 만다라 문양의 설계도면 >
사원의 도면 구상과 토대 작업이 끝나고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해 태양을 상징하는 금박과 달을 상징하는 하얀 사파이어를 묻었다.
이 헌물위에는 묘실과 중앙탑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중앙 탑을 중심으로 4개의 신전산을 세웠으며 계단처럼 3단계의 언덕을 쌓았다.
< 앙코르 와트 구조 >
메루산과 그 주변산을 본뜬 5개의 신전산은 그 무게가 수천톤에 달했다.
이 엄청난 규모의 사원은 캄보디아의 극심한 기우 속 도시에 지어졌다.
앙코르 톰(수도)은 1년중 6개월은 우기로 물이 남아돌 정도로 풍부하지만 나머지 6개월은 건기로 물이 부족했다.
강우량도 일정치 않아 해마다 그 차이가 극심했다.
건기에 대비해 우기에 물을 모아두기 위해 9세기부터 크메르인들은 거대한 수리시설을 만들기 시작했다.
12세기에 이르러 1500㎢대지에 수로와 저수지 수백개를 건설됐다.
< 앙코르 톰의 크고 작은 수로망 >
이 수로망은 LA를 뒤덮을 규모이다. 산업혁명 전까지 앙코르 톰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 앙코르 톰의 위성사진 >
거대한 면적때문에 앙코르 톰의 전체 모습을 한눈에 보기위해 위성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홍수와 가뭄을 반복하는 앙코르 톰의 땅속 흙과 흙사이에는 물이 차있다.
우기가 되면 지하수면이 상승해 토대를 들어올린다.
건기가 되면 지하수면 은 내려가면서 흙이 말라버리게 되면서 땅이 꺼져 토대와 위의 건축물이 무너져버린다.
< 우기와 건기의 지하수면의 변화 >
수로와 저수지를 이용해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기술을 가진 크메르인들은 물의 힘에 버티는 방법 대신 물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았다.
앙코르 와트를 수면에 떠있는 배처럼 만든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물이 없는 건기에 앙코르 와트를 가라앉지 않게 만드는 비결이 필요했다.
수면을 유지시키기 위해선 앙코르 와트 근처에 저수지를 만들어 365일 높이를 유지해야 했다.
앙코르 와트를 살펴보면 이 안전장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사원을 둘러싼 거대한 해자가 그것이다.
< 앙코르 와트를 둘러싼 해자 / 폭 200m >
해자는 우기동안 빗물을 모아 수면상승을 억제하고 건기동안은 흙이 해자의 물을 흡수해 수면을 일정하게 유지시킨다.
< 해자의 역할 >
계절에 따라 5월 ~ 12월 사이에는 농사를 짓게 하였으며 나머지 농한기에는 왕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
해자 건설에 투입된 숙련된 노동자만 5천명이었다. 덕분에 해자 굴착 공사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됐다.
해자를 만들기 위해 퍼낸 흙과 모래는 덤프트럭 20만대 분량이었다. 이 많은 흙과 모래는 3단의 언덕을 쌓는데 이용했다.
하지만 철근과 콘크리트같은 튼튼한 구조물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흙을 돌벽안에 채워 넣었을까?
크메르인들은 라테라이트란 토양을 이용했다.
라테라이트는 퇴적층으로 버터 자르듯 부드럽게 자른 뒤 성형하면 단단하게 굳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 라테라이트로 만든 벽돌 >
라테라이트는 캄보디아에 매우 풍부했다. 크메르인들은 라테라이트가 마르기전에 빠르게 벽돌로 성형했고 운반조가 그것을 날랐다.
라테라이트를 이용해 앙코르 와트를 건축할수 있었지만 문제가 또 있었다. 바로 구멍투성이의 흉한 라테라이트의 외관이었다.
라테라이트를 가리고 섬세한 부조조각을 하기위해 사암을 사용했다.
외관에 사암을 층층히 쌓아올려 덩어리를 만들고 그것을 통째로 조각했던 것이다.
사암을 구하기 위해 크메르인들은 앙코르 톰의 북쪽 쿨렌산으로 향했다.
< 쿨렌산 위치 >
쿨렌산은 많은 지류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쿨렌산에서 시작된 강은 앙코르 톰까지 이어져 흐른다.
클렌산의 채석장에서 크메르인들은 끌을 이용해 암석에 홈을 판다음 나무 쐐기를 박아 물을 먹여 팽창시켰다.
팽창된 나무 쐐기 때문에 암석에서 바위가 쪼개져 떨어져 나갔다.
< 나무 쐐기를 이용한 바위 절단 방법 >
앙코르 와트 건축을 위해 옮겨질 돌은 최소 2톤에서 최대 12톤까지 엄청난 크기와 무게였다.
하루동안 자르고 나르는 거대한 사암 덩어리는 약 300~400개 사이로 추정된다.
많은 학자들은 이들이 어떻게 사암 덩어리들을 쿨렌산으로부터 30km나 떨어진 앙코르 톰으로 운반했는지 궁금해했다.
운반방법의 답은 바로 강물에 있었다. 크메르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수로를 이용해 배나 뗏목을 만들어 돌을 손쉽게 실어나른 것이다.
이 방법이 사용된 것이란 확증은 벽의 부조에서 찾아 볼수 있다.
< 군대와 뗏목 부조 >
젤 아래에는 물고기가 가득 한 강이 있고 그위론 둥근 나무를 이용해 엮인 뗏목이 보인다.
이 뗏목 위에는 코끼리와 군대가 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뗏목은 사암의 엄청난 무게를 견딜수 있게 만들어졌다.
수로를 타고 운반된 사암은 코끼리나 물소같은 가축을 이용해 사원까지 운반되었다.
건기가 되어 강의 수위가 낮아졌을 때는 수로를 지나는 다리의 아치를 막아 수문을 만드는 방법으로 물의 수위를 높였다.
< 다리로 수문을 만들어 물의 수위를 조절함 >
사원 부지로 들어온 돌을 사원 곳곳으로 운반하는데 해자가 큰 역할을 하였다.
앙코르 와트를 사방으로 둘러싼 해자에 돌을 띄우면 공사현장 어디로든 운반할 수가 있었다.
앙코르 와트의 벽돌마다엔 구멍이 뚫려있다.
< 벽의 구멍들 >
이 구멍에 나무막대기를 꽂아 물을 먹여 팽창시킨 다음 밧줄을 감아 보다 손쉽게 사암 돌덩이들을 운반할 수 있었다.
또한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기 위해 비계와 도르래, 코끼리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비계 >
엄청난 높이만큼이나 앙코르 와트의 경이로운 것은 바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조립된 바위들이다.
앙코르 와트의 벽돌은 아래, 위, 옆에 이르기까지 말끔한 이음새를 자랑한다.
< 앙코르 와트의 벽 이음새 >
크메르인들은 돌을 정확히 끼워 맞추기 위해 거친 사암 표면을 연마했다.
두 돌 사이에 물을 끼얹고 서로 문질러 표면을 부드럽게 다듬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시멘트나 회반죽 없이 돌과 돌의 마찰만으로 돌들을 고정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이 회반죽을 쓰지 않은 이유는 벽면에 섬세한 조각을 하기 위해서였다. 회반죽을 쓰면 이음새가 거칠어져 조각에 방해가 된 것이다.
< 회반죽을 이용한 벽돌 고정 >
장인이 벽에 도안을 그리면 도제가 스승의 그림을 돌에 새겼다. 이 섬세한 작업에만 건축시기 35년중 반이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굉장히 얇은 벽면에 놀랍도록 풍부한 원근감을 새겨 넣었다.
< 앙코르 와트의 부조들 >
하지만 지금 부조의 모습은 건축 당시의 모습과 다르다. 원래 앙코르 와트의 부조들은 모두 금박이 입혀져 황금빛으로 빛났다.
< 금장이 남아있는 모습 >
수르야바르만 2세는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 수르야바르만 2세의 군대들 >
수르야바르만 2세는 왕위를 찬탈한 뒤 베트남과 미얀마를 침공하여 엄청난 영토를 손에 넣었다.
정복전쟁으로 불어난 인구를 어떻게 먹여살렸을까? 바로 톤레사프 호수의 범람 때문에 식량조달이 가능했다.
< 톤레사프 호수 >
톤레사프 호수는 우기면 열대성 강우와 히말라야 지표수가 합쳐져 강물이 호수로 역류한다. 주변은 물에 잠기고 호수는 4배로 커진다.
물이 빠지면 광활한 평야는 벼농사에 적합한 비옥한 토지로 바뀌고 이로 인해 1년에 3번까지 벼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다. ( 나일강의 범람과 같음 )
톤레사프 호수의 범람은 크메르 제국과 거대한 도시 앙코르의 성장 원동력이었다.
앙코르 와트에는 1,532개의 기둥들이 즐비해있다. 이 기둥들을 높이 쌓기 위해 장부맞춤 기법을 썼다.
< 장부맞춤 >
장부맞춤은 원래 목공기술이지만 이를 석공에 이용했다. 실제로 크메르인들은 나무로 집과 궁전을 짓는 노련한 목수들이었다
앙코르 와트에서 배제된 건축기술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치였다.
< 성당의 아치 >
아치는 여러 건물에서 유용하게 많이 쓰이지만 몇가지 조건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아치 양쪽 끝에서 강한 힘을 받아야 아치가 지탱되는 것이다.
강한 횡압력이 없으면 아치는 주저앉아버리는 특성을 가진 위험한 건축 기법이기도 하다.
< 아치의 안정적 구조 원리와 힘의 분산 >
코메르인들은 이런 아치대신 앙코르 와트 탑에 코벨이란 건축 기법을 사용했다.
< 코벨 아치 / 홍예식 아치 >
코메르인들은 작고 섬세한 복도와 방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유럽식 아치는 필요 없었다. 블록을 쌓듯이 지붕을 쌓아나갔다.
< 앙코르 와트의 코벨식 천장 >
착실히 진행되던 사원 건축이 난항에 부딪쳤다. 벽 안쪽에 채워놓았던 모래가 라테라이트와 사암벽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사원 전체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었다. 그 해결책은 바로 가파른 계단이었다.
< 앙코르 와트의 계단과 압력지탱 방법 >
1980년대, 대대적인 사원 복원이 시작됐다.
지붕에서 비가 새는 것을 막기위해 시멘트로 보강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문화재 보존에 독이 되었다.
시멘트의 부식물이 사원 내부로 흘러들어 부조들을 부식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앙코르 와트의 부조중 가장 유명한 유해교반이 잘못된 보수공사로 인해 위험에 빠졌다.
< 유해교반 : 영생을 놓고 싸우는 신과 마귀들과 가운데 비슈누가 부조되어있음 >
유해교반은 긴 회랑 복도 한면 전체에 부조되어있는 최고의 작품이다.
앙코르 와트를 건축할때 크메르인들은 잦은 비에 대비하여 지붕에 배수 장치홈를 만들어놓았다.
< 지붕 배수홈 >
비가 스며들더라도 배수홈을 따라 사원밖으로 흐르게 만들어놓은 것을 보수공사로 막아버린것이다.
그로 인해 사원 내부가 비로 인해 침수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새로 보수 공사를 하고 있다.
앙코르 와트는 수르야바르만 2세가 죽어 중앙탑 아래 묻힌 뒤에도 계속해서 공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현재 앙코르 와트는 미완성 상태이다. 계속해서 비대해진 도시와 무분별한 개간 사업으로 인해 수로 시설이 복잡해져 문제가 생겼다.
우기에 토사가 쌓이기 시작하면서 식량생산과 각종 수송 체계가 마비되기 시작했고 이웃 나라의 침공을 계속해서 받았다.
1431년, 타이군에 의해 수도 앙코르가 정복당했고 이듬해 크메르 왕은 수도를 버렸다.
그렇게 앙코르는 밀림과 늪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앙크르 와트는 건재했다.
15세기 힌두교 사원에서 불교사원으로 바뀌었지만 완벽히 방치되진 않았다.
그 누구도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 앞에서 앙코르 와트의 존재감을 잊을 순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앙코르 와트 3D >
참고 : 네셔널지오그라피, 구글, 네이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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