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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민족의 식사량 클라스를 알려주는 기록들

 

 

 

 

 

 

세조 시대 선비 홍일동이 하루는 진관사에 놀러갔다가

밥 3 바리(여기서 바리란 스님이 쓰는 나무로 된 큰 대접)
떡 1 그릇.
국수 3 그릇.
두부 9 그릇.
청포묵 9 그릇.

를 한끼 식사로 먹음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마을에서 대접을 받게 되자
 
삶은 닭 2 마리.
생선회 1 접시.
생선국 3 그릇.
술 40 잔.

를 거뜬히 먹음

 

 

-필원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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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하루에 드시길 쌀 3말과 꿩 9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6말, 술이 6말, 그리고 꿩이 10마리였다.

성 안의 시장 물가는 베 1필에 벼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을 하였다.

 

삼국유사 무열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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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은 하얗고 명랑하며 대식가들이다

-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1532~15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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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중국인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조선시대 문신 이극돈의 상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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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에 힘쓰는 건 으뜸이다.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항상 큰 사발에 밥을 퍼서 쇠숟가락으로 퍽퍽 퍼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라며 비웃었다."

엥겔지수가 높아서...ㅠㅠ

 

이익 -성호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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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신 이상공이 명나라 재상의 식사초대를 받고 방문했는데

마침 일이 생겨서 명나라 재상은 조정에서 퇴근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상공이 기다리고 있으니

명나라재상의 가족들이 사정을 이야기 하고

기다리면서 먹으라고 술과 안주를 내줬다

술과 안주를 먹다가 아직 식전이라고 돌아가야겠다고 하니까

떡과 과일들을 내줬다

그걸 다 먹고 다시 밥먹으로 가야한다니까

고기등등 음식들을 내줬다

그렇게 4~5번 음식을 내줬는데
다먹더니 도저히 안되겠다고 밥먹어야 겠다고 돌아갔다

명나라 재상이 돌아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더니

 

"조선 사람은 밥을 아니 먹으면 굶는다고 여기니, 내 밥을 대접하란 말을 잊었노라"

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서유문 - 무오연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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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량이 얼마나 있는지 첩자가 알아내 왔다

조선군의 식사량으로 계산하니 1달치 정도.

그래서 조정에서는 1달만 버티면 왜군들이 물러가리라 생각하고

성앞에 진을 치고 1달간 기다렸는데

1달이 지나도 왜군이 후퇴하지 않자 결국 공격해서 쫒아냈는데

왜군진영에서 나온 밥그릇이 조선군 밥그릇의 1/3정도임을 보고

이놈들이 오래 버틸려고 김치종지에 밥을 먹었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오희문 -쇄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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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은 투박한 탐식과 식욕을 가진 대식가이다.

평소 그들의 식사방법이 이를 잘 보여주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는 대신이건 평민이건 구별이 없다.

많이 먹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며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조선인들은 식사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식사하는데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수다를 떨지않는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64세에서 65세가 다 된 어떤 사람은 식욕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5사발을 비웠다.

10사발을 감당할 때 장사라고 말한다.

 


소를 잡을 일이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닭 한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과 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후략...

 

다블뤼(Daveluy, 안돈이)주교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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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군사소설가 윤민혁씨의 조선시대의 대식문화 관련 글

 

조선시대의 1홉은 60cc로, 현대의 1/3 이하입니다.
7홉은 420cc으로, 현대 한국인이 먹는 하루 쌀 분량과 거의 맞먹습니다. (현재 공기로 5공기)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어른 남자 7홉, 어른 여자 5홉, 아이 남녀 3홉으로 한끼를 먹었습니다.

아이들이 먹는 양도 180cc로, 현대 한국인의 일반적인 식사량인 120~150cc보다 많습니다.

근거자료는 17~18세기 이후 나온 수많은 각 가문별 쌀 소모기록들과 성호사설, 그리고 흥부전입니다.

선조 때는 달랐지 않을 수도 있느냐고 묻는다면,

기근이 있을 때마다 조선 조정 관원들이 개탄하는 지나친 대식 풍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극심한 식량난으로 수군 자체가 와해 직전에 있던

1594년에도 이순신은 "하루 쌀 5홉 이하로 먹이고 있는데도 모자라니

이대로 가면 몇월달 이후로는 식량보급 불가"라고 보고하고 있죠.
즉 현대인의 두배 가까운 밥을 병사들에게 먹이고 있었는데도

병사들이 굶주려서 싸울수가 없다..라는 것이죠..

 

 

우리와 비슷한 정도의 생활수준이었던 일본 농민들이 먹는 것에 비해서

조선 농민들은 거의 3배 이상 먹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서울 탈환이 어렵겠다고 투덜대는 조선군 탐보군관 이야기가 실록에도 실려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 임란 전만 해도 ) 그 대식성을 충분히 만족시킬 만큼 생산력이 뒷받침 되었다죠.

제가 "조선의 뒷풍경"인가 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조선 전기 한양 시내에 하루에 잡는 소만 100 마리고,

하루에 소주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미곡만 백섬이다"

수치가 확실히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쨋든 대단한 양이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선은 생산력이 됐기 때문에 그 "GR"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조선 사람들, 고기 디지게 먹고 쌀은 배가 찢어지게 먹어댔습니다.

되니까 먹는 건 당연하고 그건 흠이 아닙니다.

다만 그걸 전부 무시하고 "우리가 망한 건 가난해서다"타령을 하는 건 용납하기 힘듭니다.

가난의 범주를 제대로 지적한다면 모르지만,

아니라면 우리는 적어도 굶주릴 일은 없었다는 말 한 마디로 때려치우고 말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15~17세기에 있었습니다.

조선의 쌀 생산량은 19세기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농업생산력의 강도가 3배까지 강화된 지금인데도,

경지면적면에서 조선 전체와 지금 한반도 경지면적을 대비해보면

오히려 지금의 농업생산규모는 조선보다 작을 수도 있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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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 병자 양란과 17~18세기 소빙기로 인한 대흉작으로 농업, 상업체계가 무너진 이후 

우리가 아는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미지가 만들어짐...

 

사실 조선 전기~임진왜란발발전 만 해도 저렇게 먹는걸 충분히 버틸 정도로 생산량이 나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