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명랑해전이 세계4대해전에 끼지 못하는 이유

민초들의 안위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사심 없이 자기를 내 던진 이순신. 한민족 역사를 통
틀어 최고의 전쟁영웅이자, 애절한 휴머니스트요,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난중일기)작가는 억
울한 누명을 쓰고 선조가 내리는 모진 국문을 받았었다.

이원익, 이억기가 선조를 만류하고 정탁이 목숨을 걸고 신구차를 선조에게 올려 이순신은
극형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 밑에서 일개 군관으로 복무한다. 그렇게 삭탈관직 당하고 한양
에서 충청도, 전라도를 거쳐서 경상도 합천까지에 이르며 병사들을 모았던 길이 바로 '백의
종군로'이다.


조정이 해준 것이라고는 거듭되는 전승에 훈장은커녕 시기와 질투, 곤장, 사사건건의 시비
였고, 인심 쓰듯이 왜와 싸워 빨리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뿐이기에 제 한 목숨 걱정하
는 소인배 같았으면 ‘더러워서 못해먹겠음’을 토로하면서 때려 치고 산속으로 들어갔을 것
이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일신의 영달이 아니라 풍전등화에 놓인 나라를 왜로부터 지키는
것이었다.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수군을 재건해서 왜의 병참로를 끊는 것이
었다. 당시 왜군들은 부산포로 들어와 남원과 전주를 함락하고 충청도까지 올라온 터였으나
그 외의 지역으로는 길이 험하고 산발적 저항 때문에 세력이 나라 전반에 미치지 못하던 때
였다. 이에 왜군들은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을 꿰 했는데, 결국 수군을 막을 수 있는
지의 여부가 이 전란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순신이 한양에 끌려가 국문을 당하던 당시 수군은 칠천량에서 대패하여 거북선이
고 뭐고 다 침몰하여 이미 궤멸되다 시피 했고, 이에 덩달아 육군의 사기도 떨어진 터였다.
임금인 선조까지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 갔던 상황이고 보면 이제 왜가 선단을 이끌
고 서해로 진출하면 그걸로 국운은 다하는 것이었다.

이때 민족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 가득 한 흰 두루마기의 노구가 국문의 후유증으로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바로 이 길을 걸으며 전장에 함께 뛰어들 백성들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이순신은 되는 대로 병참과 사람을 긁어 모았다.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남은 12척의 크
고 작은 함선이 전부였다. 이 함선은 칠천량 해전 당시 경상우병사 배설이 전세가 불리한 것
을 확인하고 도망해서 회령포에 버려두다 시피 한 배였다.

이러한 궁색한 상황을 살피던 선조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폐지하고 권율휘하의 육군으로 들
어가라는 교지를 내린다. 하지만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시작되는 장계를 선조
에게 올린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왜군은 얼마 전 칠천량 해전에서 140척의 조선 함선을 격파했던 지라 사기는 하늘을 찌르
고 있었다. 조선수군이 12척의 배를 가지고 자신들의 330여척 대 선단에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것은 자명했다. 이렇기에 왜군은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을지라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얕봤다.

하지만 그것은 왜의 오판이었다. 이순신은 ‘죽음을 각오한 결의’와 울돌목의 조류를 전술적
으로 이용하여 왜군 330척의 선단을 대파한다.(명량해전) 이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는 선박

 

- 0척, 사상자 - 100여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비해, 일본군의 피해는 완파 31척, 반파 90척,

 

사망자 8,000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은 완전히 무산되었는데,

 

명랑해전은 그렇게 조선이 왜군의 기를 꺾어 정유재란의 승리를 일궈내는 교두보가 된 전

 

투였다.

세계 해전사의 4대 해전이라고 할 것 같으면, 살라미스해전, 칼레해전, 트라팔가해전, (이순
신)한산도해전이 기록되어 있는 바, 명랑해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
다. 이 전투가 앞선 설명대로 너무도 극적이고 12대 330이라는 압도적 수적 불리를 극복했
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를 저들 서양의 사가들이 믿을 수 없다는 이유이다. 특히나 다른 해
전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와 풍족한 병참 속에서 이뤄낸 성과였다. 하지만, 이순신의 명량
해전은 왕 이하 고관대작들의 암투와 병참의 절대 부족을 이겨내고 빚어낸 성과이기에 이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를 서양의 사가들은 신화로 밖에 여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은 그 패전의 당사자 일본인들의 객관적 증언
을 통해 뒷받침 된다. 일 예로 1907년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러시아의 극동함대와 싸
워 이김으로써 동아시아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의 도오고 헤이하찌로 제독은 전승축하연에서
자신은 영국의 넬슨 제독을 능가한다고 우쭐해 했다. 이에 다른 기자가 ‘조선의 이순신과
비교해서는 어떤가.’라는 질문에는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부하장교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
신이 나의 함대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고 대답하였다고 한
다. 2차대 전 중 일본 해군이 진해 앞바다로 들어 올 때마다 제를 지냈고, 심지어 일본 함
선 내에도 이순신의 사당이 세워졌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이순신을 신으로 여기는 때문인데,
이는 명랑해전을 겪은 그들 선조들에게 각인된 공포와 경외의 결과인 것이다. 1854년 일본
금행당이 발간한 ‘조선정벌기’에는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마치 지옥의 사신처럼 그려놓고
있을 정도이다.

 


 

 


문제는 사람들은 이순신을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 민족적 영웅에 대한 이야기에 벅차하고
감격하며, 당시 우리의 선조들이 느꼈을 승리감에 도취 되어, 답답한 현실을 잊기 위한 껌
으로 애용하는 듯하다. 영화 명량이 국내 개봉영화 사상 최단기간의 흥행기록을 새로 쓰며

 

질주하는 것도 아마 그 이유인 듯하다. 꽉 막힌 전체주의 질서로 억압 되고 짖밟히는 민중

 

의 억압된 심정이 대리만족을 통해서라도 해방의 돌파구를 찾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을 신격화해서 찬양만 하는 것은 아마 그 누구보다도 이순신 장군 본인이 원
하지 않는 그것일 것이다. 임진왜란이 벌어졌던 결정적 원인도 고관대작들이 그렇게 과거의
영광에만 도취도어 실질적 현실에는 등한시했던 이유가 아닌가.

따라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순신을 떠올리며 감격과 환희에 젖어있는 것이 아니
라, ‘어찌하면 이순신 같이 자신이 놓인 한계 안에서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해서 적들과 맞
설까’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부족한 재원과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맞설 수 있는 용기.
처참한 현실과 절망적 위기 속에서도 그에 휩쓸려 자포자기하지 않고 면밀히 고뇌하고 실리
를 찾고 이를 실재로 이끌어 낼 수 있는 힘. 막역한 이상과 감성이 아닌 실질적 역량에 기
반 된 의지. 세를 모으고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능력.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실존적 고뇌와 실천. 그것이야말로 이순신장군이
가졌던 가장 큰 미덕이고, 그의 휘하 장수들에게 심어주려 했던 가장 큰 재산이었으며, 400
년이 지난 우리 후손들이 물려받아야할 그의 삶의 진수인 것이다.

이 황량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이순신 속에서 그런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